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카를 6세 (문단 편집) == 즉위 전 == ||[[파일:카를 6세.jpg|width=100%]]|| ||<:>'''갑옷을 입은 카를 6세[br]고드프리 넬러 경(Godfrey Kneller) 작(1704년경)'''||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레오폴트 1세]]와 [[비텔스바흐 가문|팔츠노이부르크]]의 [[엘레오노레 막달레네]]의 사실상 차남으로 태어났다. 레오폴트 1세는 3번의 결혼에서 '''4남 16녀'''를 얻었으나 앞의 두 아들은 요절하고 마지막 결혼에서 얻은 두 아들만 생존했는데, 이것이 카를 6세와 그의 후계자와 그의 나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레오폴트 1세는 [[압스부르고 왕조|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단절이 예상되자 주변국들과 영토 나눠먹기 모의를 하다 같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2세]]의 분노를 샀다.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의 둘째 손자 [[펠리페 5세|앙주 공작 필리프]]를 상속인으로 지명한 데 이어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앙주 공작이 프랑스 왕위를 물려받을 경우를 대비해 루이 14세의 셋째 손자 베리 공작을 2순위, '''둘의 승계가 여의치 않을 경우''' 같은 가문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은 3순위로 지명했다. 레오폴트 1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왕국|프랑스]]와 [[스페인]]의 통합을 바라지 않았던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 [[네덜란드 공화국|네덜란드]] 등의 지지를 받아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대항하였고 카를로스 2세 사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기에는 유럽의 깡패 프랑스를 전 유럽이 다구리 놓는 바람에 전황이 유리했고[* 프랑스의 전황이 어느 정도로 암울했냐면 1710년 천하의 루이 14세가 "펠리페 5세가 카를 대공에게 '훔친 왕위(?)'를 신속히 양위한다"는 조건을 제외하고 연합국의 조건을 다 수용하고 평화를 구걸할 정도였다. 그러나 루이 14세의 제안은 유럽의 균형을 원하던 영국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카탈루냐]] 지방에서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상륙해 한때 [[마드리드]]에도 입성하는 등 순조로워 보였으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